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1. 깨닫고자 하면 마음을 관(觀)하라
혜가(慧可)가 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뜻으로 불도(佛道)를 구하려 한다면 마땅히 어떤 법을 닦아야 가장 간략한 요점이 됩니까?"
스님께서 답하시었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일법(一法)만이 모든 행위를 총괄하여 포섭하는 것이니 이름하여 간략한 요점이라고 한다."
묻기를, "어떠한 일법(一法)이 제행(諸行)을 총괄하여 포섭하는 것입니까?"
스님께서 답하시길,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다.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깨달을 수 있으면 만행이 구비되는 것이 마치 큰 나무가 소유한 가지와 및 모든 꽃과 열매가 다 뿌리로 인한 것과 같아서 나무를 재배(栽培)하려면 뿌리를 둠으로서 비로소 생기고, 나무를 벌목하려면 뿌리를 제거함으로서 반드시 죽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깨달아 도를 닦으면 공력(功力)을 생략해도 쉽게 이루어지고, 만약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서 도를 닦으면 이내 공력을 소비할지라도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이 다 자기의 마음을 말미암은 것이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마침내 옳지 않다."
또 물었다.
"어떻게 마음을 관하는 것이 그것을 일컬어 깨닫는 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시었다.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본래 텅 비어서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난 작용에 두 가지 차별이 있음을 보아 아는 것이다.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청정한 마음이요, 두 번째는 오염된 마음이다. 그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은 곧 무루진여(無漏眞如, 번뇌가 없는 진실 그대로)의 마음이요, 그 오염된 마음이라는 것은 유루무명(有漏無明, 번뇌가 있어 밝지 못한)의 마음이니, 이 두 가지 마음은 자연히 본래 갖추어 있어서 비록 거짓으로 인연이 화합하였으나 서로 형상을 내는 것이 아니다. 정심(淨心)은 항상 선인(善因)을 좋아하고, 염심(染心)은 항상 악업(惡業)을 생각하나니, 만약 진여(眞如)를 스스로 깨달아서 깨달음이 오염을 받지 않으면 그것을 일컬어 성인이라 한다. 드디어 능히 모든 고통을 멀리 여의고 열반락을 얻을 것이요, 만약 오염을 따라 악업을 지어 그것에 얽히고 덮임을 받으면 그것을 이름하여 범부라 한다.
이에 있어서 삼계(三界)에 빠져서 갖가지 고통을 받는다. 왜냐하면 저 오염된 마음이 진여(眞如)의 본체를 장애함으로 말미암은 까닭이다. {십지경(十地經)}에 말씀하시길, '중생의 몸 가운데에 금강과 같은 불성(佛性, 여래장, 부처의 성품)이 있어서 마치 태양은 본체가 밝고 원만해서 광대하고 끝이 없는 것과 같건마는 다만 오음(五陰)의 검은 구름에 덮인 바가 되어서 마치 병 속의 등 빛이 나타날 수 없는 것과 같다'하시고,
또 {열반경(涅槃經)}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으나 무명(無明)에 덮인 까닭으로 해탈할 수 없다'하시니,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깨달음이다. 다만 능히 스스로 깨달아서 깨달은 지혜가 명료(明了)하게 그 덮인 바를 여의면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알라 일체 모든 선이 깨달음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그 깨달음의 근본으로 인해서 마침내 능히 모든 공덕의 나무를 나타나게 하며 열반의 열매가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나니 이와 같이 마음을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깨닫는 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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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觀心) : 자기 마음의 본 성품을 바르게 살펴보는 일을 관심이라 한다. 마음은 일체 만법의 주체로서 모든 것은 마음과 관계되므로 마음을 관조하는 것은 곧 일체만법을 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을 살펴보면 모든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2. 일체 고통을 멸하여 해탈하려면 삼독(三毒)을 버려라
또 물었다.
"위에서 설한 진여불성(眞如佛性)과 일체공덕은 깨달음으로 인해서 근본을 삼거니와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의 마음과 일체 모든 악은 무엇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입니까?"
답하시었다.
"무명의 마음이 비록 팔만사천 번뇌의 정욕이 있어서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악이 무량무변하나 요점을 취해 그것을 말하자면 다 삼독(三毒)으로 인해서 근본을 삼으니, 그 삼독이라는 것은 곧 탐진치(貪瞋癡)이다. 이 삼독심(三毒心)이 연연히 본래 일체 모든 악을 갖추고 있어서 마치 큰 나무 뿌리가 비록 이 하나이나 소생하는 가지와 잎새들은 그 수가 끝이 없는 것과 같아서 저 삼독의 뿌리도 하나 하나의 뿌리 가운데 모든 악업을 내되 백천만억가지이다.
앞에서보다 배나 지나서 비유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삼독이 하나의 본래의 몸에 스스로 삼독이 되어서 만약 육근에 상응하여 나타나면 또한 이름하여 육적(六賊, 육식)이라 하니 육적이라는 것은 곧 육식(六識)이다. 이로 말미암아 육식이 모든 근에 출입하여 만가지 경계에 탐착한다.
그러한 후에 악업(惡業)을 이루어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장애하나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여섯 가지 도적이라 한다. 일체중생이 이 삼독과 육적으로 말미암아서 신심(身心)을 미혹하게 하고 산란하게 해서 생사에 빠지게 하며 육취(六趣)로 윤회해서 모든 고뇌를 받는 것이 마치 강물이 조그만 샘의 근원으로 인해서 시내물의 흐름이 끊이지 않으며 이에 능히 두루 가득하여 만리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아서 만약 어떤 사람이 그 근원을 끊으면 여러 가지 흐름이 모두 쉬게 될 것이다.
해탈을 구하는 자도 능히 삼독을 굴려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삼으며, 능히 육적(六賊, 육식)을 굴려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삼으면 자연히 일체의 모든 고통을 영원히 여읠 것이다."
또 물었다.
"삼독(三毒)과 육적(六賊)이 광대하여 끝이 없거늘 만약 오직 마음만을 관(觀)한다면 어떻게 저 다함이 없는 고통을 면하겠습니까?"
답하시었다.
"삼계의 업보가 오직 마음이 나게 하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요달한다면 삼계 가운데에서 곧 삼계를 벗어날 수 있다. 그 삼계라는 것은 곧 삼독이니, 탐함은 욕계라 하고, 성냄은 색계라 하며, 어리석음은 무색계이니, 이 삼독심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악을 결집하며 업보가 성취되어서 육취에 윤회하는 까닭으로 이름하여 삼계라 한다. 또 삼독으로 짓는 업이 가볍고 무거움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 동일하지 않아서 분수에 따라 육처(六處, 육도)에 돌아가는 까닭으로 인하여 육취(六趣)라 한다."
또 물었다.
"어떻게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나누어 여섯 가지라고 합니까?"
답하시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정인(正因, 바른 깨달음의 길)을 알지 못하고 미혹한 마음으로 선을 닦으면 삼계를 면하지 못해서 세 가지 가벼운 세계에 태어나니 무엇을 세 가지 가벼운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미혹하여 십선(十善)을 닦아서 망령되게 쾌락(快樂)을 구하면 탐욕의 세계를 면하지 못해서 천취(天趣, 천상계)에 태어나고, 미혹한 마음으로 오계(五戒)를 지켜서 망령되게 사상하고 미워함을 일으키면 성냄의 세계를 면하지 못해서 인취(人趣, 인간계)에 태어나고, 미혹한 마음으로 유위(有爲, 현상의 세계)에 집착해서 삿된 것을 믿어 복(福)을 구하면 어리석음의 세계를 면하지 못해서 수라취(修羅趣, 수라계)에 태어나니, 이와 같은 세 가지 부류를 이름하여 세 가지 가벼운 세계라고 한다.
무엇을 세 가지 무거운 세계라고 하는가? 이른바 삼독심(三毒心)을 쫓아서 오직 악업만을 지어서 세 가지 무거운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만약 탐하는 업이 무거운 자는 아귀취(餓鬼趣, 아귀계)에 떨어지고, 성내는 업이 무거운 자는 지옥취(地獄趣, 지옥계)에 떨어지고, 어리석은 업이 무거운 자는 축생취(畜生趣, 축생계)에 떨어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무거운 것과 앞의 세 가지 가벼운 것을 통설(通說)해서 마침내 육취(六趣, 육도)를 이룬다. 그러므로 알라. 악업이 자기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다만 능히 마음을 포섭해서 모든 사악함을 여의면 삼계(三界)와 육취(六趣)에 윤회하는 고통이 자연히 소멸하고 능히 모든 고통을 다하면 이름하여 해탈이라 한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3. 삼독(三毒)이 곧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다
또 물었다.
"저 부처님께서 설한 바에 의할 것 같으면, 나는 저 아승지겁(阿僧祗劫)에 한량없이 부지런히 애써서 바야흐로 불도를 이루었다고 하셨거늘, 어떻게 지금에 말씀하신 것은 오직 삼독을 제거하면 곧 해탈이라 이름한다고 하십니까?"
답하시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은 허망함이 없다. 아승지(阿僧祗)라는 것은 곧 삼독심이니, 인도 말에 아승지(阿僧祗)라는 것은 한(漢)나라 말에 셀 수 없는 것이다. 이 마음 가운데에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은 악한 생각이 있어서 하나 하나의 생각 가운데에 다 일겁(一劫)이 있으니, 항하(恒河)라는 것은 셀 수 없다는 의미이다.
삼독의 악한 생각이 항하와 같은 연고로 셀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진여(眞如)의 본성이 이미 삼독에 덮여진다면, 만약 저 항하의 모래와 같은 악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무엇을 이름하여 해탈이라 하겠는가? 지금에 능히 탐진치(貪瞋癡) 등의 삼독심(三毒心)을 제거하면 이를 곧 이름하여 삼대아승지겁(三大阿僧祇劫)을 건너갔다고 한다. 말세에 중생이 어리석고 둔한 근기로 여래의 심오하고 미묘한 의미의 삼아승지(三阿僧祗)란 비밀한 설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렇게 진겁(塵劫)을 지나서 바야흐로 부처를 이룬다고 하니, 말겁(末劫)에 어찌 수행하는 사람을 그르쳐서 보리도(菩提道)에서 물러나게 한다고 의심하지 안겠는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4. 삼취정계(三聚淨戒)는 삼독(三毒)을 멸하는 것이다
또 묻기를 "보살마하살이 삼취정계(三聚淨戒)를 받아 가지고 육바라밀을 수행함을 말미암아서 바야흐로 불도를 이루려하거든, 이제 배우는 자로 하여금 오직 관심(觀心)을 수지하고 계행을 수행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성불할 것입니까?"
답하시기를, "삼취정계(三聚淨戒)라는 것은 곧 삼독심(三毒心)을 제어하는 것이다. 한가지 독한 마음을 제어해서 한량없는 선을 이룬다. 취(聚)라는 것은 모이는 것이다. 삼독심(三毒心)을 제어할 수 있다면 곧 세 가지 한량없는 선이 있어서 널리 마음에 모으는 것이 이름하여 삼취정계라고 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는 것은 곧 육근(六根)을 맑게 하는 것이니, 인도의 바라밀(波羅蜜)란 것은 한(漢)나라 말로 저 언덕(彼岸)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니, 육근이 청정해서 세상 티끌에 물들지 않으면 곧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문득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육바라밀이라고 한다."
또 묻기를, "경에 설한 바에 의하면 삼취정계(三聚淨戒)라는 것은 맹세코 모든 악을 끊고, 맹세코 모든 선을 닦으며, 맹세코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거늘 지금 오직 말씀하시길, 삼독심을 제어하는 것일 뿐이라 하시니, 어찌 글의 뜻이 어그러짐이 있지 않겠습니까?"
답하시기를, "부처님께서 경에 설법하신 이것은 진실한 말씀이다. 마땅히 그릇됨이 없다. 보살마하살이 과거에 성불의 인(因)을 닦는 중에 보살행을 닦을 때에 삼독에 대치하기 위해서 세 가지 서원(誓願)을 발해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수지(受持)하셨다. 항상 계행(戒行)을 닦아서 탐독(貪毒)에 상대하여 모든 악(惡)을 끊기로 맹세한 까닭이며, 항상 선정(禪定)을 닦아서 진독(嗔毒)에 상대하여 모든 선(善)을 닦기로 맹세한 까닭이며, 항상 지혜(智慧)를 닦아서 치독(癡毒)에 상대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로 맹세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계(戒), 정(定), 혜(慧) 등 세 가지 깨끗한 법을 수지(受持)한 까닭으로 저 삼독(三毒)의 악업(惡業)을 초월해서 불도를 이룬다. 삼독을 제어하면 곧 모든 악이 소멸하는 까닭으로 이를 이름하여 끊는다고 한다. 삼취정계를 수지하면 곧 모든 선이 갖추어지는 연고로 이를 이름하여 닦는다고 하는 것이니,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 만행이 성취되어서 자타가 함께 이로워져서 두루 여러 중생을 구제하는 연고로 이를 이름하여 도(度)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닦은 바 계행은 마음을 여읜 것이 아니다.
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깨끗하면 일체중생이 다 청정한 연고로 경(經)에 이르시기를, '마음이 더러우면 중생이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중생이 깨끗해진다'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국토를 정화하려면 먼저 그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 마음을 깨끗함을 따라서 곧 불국토가 깨끗해진다' 하시니, 만약 세 가지 독한 마음을 제어할 수 있으면 삼취정계가 저절로 성취될 수 있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5. 누구나 법유(法乳)를 먹으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룸
또 묻기를, "경문에 설한 바에 의하면 '석가여래께서 보살행을 수행할 때에 일찍이 서말 여섯 되의 젖을 마시고서야 비로소 불도를 이루셨다'고 하시니, 먼저의 인행시에 젖을 잡수신 후에 불과(佛果)를 증득하셨는데, 어찌 마음을 관찰하기만 하면 해탈을 얻는다 하십니까?"
답하길, "진실로 경의 말씀과 같아서 거짓이 아니다. 반드시 젖을 먹고서야 비로소 부처를 이룰 수 있다. 부처님께서 잡수신 젖은 세간의 깨끗하지 못한 젖이 아니라 진여(眞如)의 깨끗한 진리의 젖이다. 세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삼취정계(三聚淨戒)요, 여섯 되라고 하는 것은 육바라밀(六波羅密)이다. 부처님께서도 도를 이루실 때에 이 깨끗한 진리의 젖을 잡수신 까닭에 불과(佛果)를 증득하셨거늘, 도리어 말하기를, '여래께서 세상의 음욕으로 화합한 더럽고 비린내 나는 젖을 잡수셨다'고 한다면 그 어찌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겠는가?
여래는 금강과 같이 단단하여 무너지지 않는 무루(無漏)의 법신(法身)이다. 세간의 모든 고통을 영원히 여의었거늘 어찌 이러한 깨끗하지 못한 젖으로써 기갈을 면하겠는가? 경에 이르기를, '이 소는 높은 언덕에도 있지 않고, 낮은 습지에도 있지 않으며, 알곡이나 겨도 먹지 않고, 잡된 소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몸은 자마금(紫磨金)의 빛깔이다'라고 하셨다.
이 소라 한 것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니, 대자대비(大慈大悲)로써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시어 깨끗한 법신으로부터 이러한 삼취정계와 육바라밀의 미묘한 법유(法乳)를 흘러내어 해탈을 구하는 모든 이를 먹여 기르신다. 이처럼 깨끗한 소의 깨끗한 젖은 다만 부처님만 마시고 도(道)를 이룰 뿐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누구나 마시기만 하면 모두 아눗다라삼먁삼보디[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을 수 있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6. 참다운 공덕을 지어야 지복(智福)을 받음
또 묻기를, "부처님께서 경에서 설하시기를, '중생으로 하여금 절을 짓거나 불상을 조성하거나 향을 사르고 꽃을 흩거나 장명등(長明燈)을 밝히거나 밤낮으로 여섯 차례 예불을 하거나 재계(齋戒)를 지키고 예배하는 등 갖가지 공덕을 닦게 하면 모두가 불도를 이루리라'하셨거늘, 이제 말씀하시길, '마음을 관찰하는 한 법이 모든 수행을 다 거두어들인다'고 하시니, 이러한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마땅히 허망한 것이겠습니까?"
답하길, "부처님께서 설하심은 경에 한량없는 방편이 있다. 중생들의 근기가 둔하고 열악하여 아주 깊은 묘리(妙理)를 알지 못하므로 유위(有爲)의 일을 빌려 무위(無爲)의 이치를 깨우치게 하신 것이다. 만약 다시 안으로 행하여 수행하지 않고 오직 단지 밖으로 구하여 복만 희망하여 얻고자 한다면 옳지가 않다.
가람(伽藍),이라는 말은 범음(梵音)이요. 이 말은 청정한 곳이라는 것이다. 만약 영원히 삼독(三毒)을 제거하고 항상 육근(六根)을 청정하게 하여 몸과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 안팎이 청정하면 이것이 바로 수행하는 가람이다.
또 불상을 조성한다는 것은 곧 일체중생이 구하는 것이다. 이른바 온갖 깨닫는 행을 닦을 때에 여래의 참된 용모와 미묘한 형상을 빌리는 것인데 어찌 쇠와 구리로 주조하여 지은 것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해탈을 구하는 자는 몸으로써 화로를 삼고, 법으로써 불을 삼으며, 지혜로써 공장을 삼고, 삼취정계(三聚淨戒)와 육바라밀(六波羅密)로써 본보기를 삼아서 몸 가운데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녹이고 단련해서 두루 일체 계율(戒律)에 들어가 본뜨는 가운데 가르침과 같이 받들어 행해서 한 가지라도 결루(缺漏)됨이 없게 하면 자연히 참된 용모의 상호를 성취하리라. 이른바 구경에 영원히 존재하는 미묘한 법신(法身)이요, 이는 유위(有爲)의 무너지는 법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도(道)를 구함에 참된 용모를 주조할 줄 모른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문득 공덕을 이룬다고 하겠는가?
향을 사른다는 것은 또한 세간의 형상이 있는 향이 아니오, 나아가 이것은 무위정법(無爲正法)의 향이다. 모든 냄새나는 더러운 것을 좋은 향기로 바꾸어 무명(無明)의 악업(惡業)으로부터 모두 소멸하게 하는 것이니, 그 정법의 향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계향(戒香)이니 이른바 능히 모든 악을 단절하며, 능히 모든 선을 닦는 것이다. 둘째, 정향(定香)이니 이른바 대승(大乘)을 깊이 믿어서 마음에서 물러남이 없는 것이다. 셋째, 혜향(慧香)이니 이른바 항상 몸과 마음을 안팎으로 잘 관찰하는 것이다. 넷째, 해탈향(解脫香)이니 이른바 능히 무명(無明)의 결박을 끊는 것이다. 다섯째,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니 이른바 지각(知覺)하고 관찰함이 항상 밝아서 걸림 없이 통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향을 이름하여 최상의 향이라고 하는 것이니 세간의 향으로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던 날에 모든 제자로 하여금 지혜의 불로써 이러한 무가보(無價寶)의 향을 사루어서 시방의 일체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게 하셨다. 지금 시절의 중생은 어리석고 근기가 둔하여 여래의 진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밖에 불을 가지고 세간의 침단(沈檀)이란 훈육(薰陸)의 질애(質碍)한 향을 사루어서 복된 과보를 바라니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또 꽃을 흩는다는 것은 이치가 다음과 같다. 이른바 바른 법이란 공덕의 꽃을 널리 설하여 유정(有情,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들을 이롭게 하고, 온갖 진여(眞如, 있는 그대로 참다운 존재)의 성품을 다스려서 장엄(莊嚴)을 두루 베푸는 것이니, 이 공덕의 꽃은 부처님께서 찬탄하신 것으로서 끝내 항상 존재하여 시들거나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꽃을 흩으면 한량없는 복을 받거니와 만약 말하기를, '여래께서 제자들이나 중생들로 하여금 고운 비단을 마름질하고 초목을 꺾어서 꽃을 흩게 하셨다'고 한다면 옳지 않다. 왜냐하면 깨끗한 계행을 지키는 이는 천지 안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해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잘 못 알아 해치는 것도 큰 죄를 받거늘, 하물며 다시 요즘에 청정한 계율을 범하고 만물을 해치면서 좋은 과보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익을 얻고자 하다가 도리어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장명등(長明燈)이라는 것,은 바르게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느끼고 아는 것이 분명한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을 구하는 모든 사람은 항상 몸으로 등잔받침을 삼고, 마음으로 등잔을 삼으며, 믿음으로 심지를 삼고, 계행이 증진하는 것으로 기름 부음을 삼으며, 지혜를 밝게 통달한 것을 비유하여 저 등불의 광명과 같은 것이다. 항상 이러한 깨달음의 등불을 타게 하여 밝음이 일체 무명(無明)의 어리석은 어둠을 깨뜨리게 해야한다. 능히 이러한 법으로 차츰 밝혀 깨달으면, 이는 곧 한 등으로 백 천 등을 켜되 등과 등이 빛을 이어서 마침내 다함이 없음으로 장명등이라 이름한다.
과거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이름을 연등(燃燈)이라고 하는 의미도 이와 같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여래께서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허망한 행을 하여 유위(有爲)에 집착하여 세간의 소유(蘇油)로 등을 켜서 빈방을 비추는 것으로써 가르침대로 한다고 하니, 어찌 잘못됨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부처님의 미간(眉間)에 있는 털 하나의 광명으로도 십만팔천의 세계를 비추고, 신광(身光)을 다 나타내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게 되는데, 어찌 이런 세속의 등을 빌려서 이익을 삼겠는가? 이런 이치를 깊이 살펴보면 응당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으리라.
또 여섯 차례 행도(行道, 예불)한다는 것은 육근(六根)안에서 항상 불도를 행한다는 뜻이다. 부처란 깨달음이다. 때때로 나아가 온갖 깨닫는 수행을 닦아 육근을 조복(調伏)시키고 육정(六情 : 육근)의 청정함을 오랫동안 버리지 않는 것을 육시(六時)의 행도(行道)라고 하는 것이다.
탑(塔),이란 몸과 마음이니, 밝은 지혜로 몸과 마음을 돌면서 생각 생각이 끊이지 않는 것을 탑돌이라 한다. 과거 성현들도 이 도를 실천하여 열반을 얻었는데 세상사람이 이런 이치를 모르니 어찌 도를 실천한다고 하겠는가? 근기가 둔한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면 일찍이 안으로 닦지 않고 오직 밖으로 구함만을 집착하여 질애(質碍)한 것을 가지고서 세간의 탑을 에워싸서 밤낮 분주하게 세간의 탑을 돈다. 수고롭게 스스로피로하기만 하고 진성(眞性)에는 하나도 이익이 없으니, 미혹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이 참으로 가여운 일이다.
또 재계(齋戒)를 지키는 이는 마땅히 그 의미를 이해하여야 한다. 만약 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면 헛수고만 하게 된다. 재(齋)라는 것은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다스려서 어지럽지 않게 하는 것이요, 지(持)라는 것은 보호한다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계행을 여법(如法)하게 보호하여 가지고서 반드시 육정(六情)을 금하고 삼독(三毒)을 제어하며 부지런히 감각의 관찰을 닦아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요달하면 이름하여 재(齋)를 행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재계(齋戒)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음식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희식(法喜食)이니 이른바 여래의 바른 법에 의지하여 기쁘게 받들어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선열식(禪悅食)이니 이른바 안팎이 맑고 고요하여 몸과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요, 셋째는 염식(念食)이니 이른바 늘 부처님을 생각하되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는 것이요, 넷째는 원식(願食)이니 이른바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늘 바른 원을 행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해탈식(解脫食)이니 이른바 마음이 항상 청정해서 세상 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오정식(五淨食)을 갖는다는 것은 이름하여 재식(齋食)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런 다섯 종류의 깨끗한 음식을 먹지 않고 스스로 재계를 지킨다고 한다면 전혀 옳지 않다.
또 단식(斷食)이란 무명과 악업의 음식을 끊는 것을 말한다. 만약 문득 접촉되면 이름하여 재계(齋戒)를 깨뜨리게 되는 것이니, 재(齋)를 만약 깨뜨림이 있으면 어떻게 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미혹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이런 이치를 모르고 몸과 마음을 멋대로 행동하여 모든 악업을 짓고 방자하게 욕정을 탐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서 오직 밖의 음식만을 끊고는 스스로 재계를 지킨다고 하니, 어찌 어리석은 아이가 썩어 문드러진 시신(屍身)을 보고 말하길 산 사람이라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혀 옳지 않다.
또 예배(禮拜)라 하는 것은 항상 법답게 한다는 것이니, 반드시 이치의 바탕이 안임을 밝히고 밖의 변화가 현상의 형상임을 밝혀야 한다. 이치는 버릴 수 없는 것이요, 현상은 행하고 감춤이 있다. 이러한 뜻을 알아야 만이 나아가 법을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저 예(禮)라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요, 배(拜)라는 것은 굴복하는 것이다. 이른바 진성(眞性)을 공경하는 것이며 무명(無明)을 굴복하는 것을 이름하여 예배한다고 하는 것이다. 공경하기 때문에 감히 헐뜯고 손상하지 못하며 굴복하기 때문에 하여금 쫓아 달아나지 못한다. 만약 능히 악한 감정이 영원히 멸하고 착한 생각이 항상 존재하면 비록 나타난 형상이 없을지라도 항상 예배하는 것이며 그 형상이라는 것은 곧 몸의 형상이다. 하여금 모든 세속을 위하고자 함으로 겉으로 겸손하게 하심(下心, 마음을 낮춤)한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밖의 몸을 굴복해서 공경의 모습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것을 쓰면 나타나고 그것을 버리면 감추어지니, 밖을 들어 안을 밝혀서 성(性)과 상(相)이 상응(相應)하게 한다. 만약 다시 이법(理法)을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밖의 형상에 집착하면 안으로는 곧 미혹됨으로 탐진치(貪瞋癡)를 쫓아서 항상 악업을 행할 것이요, 밖으로는 곧 헛된 몸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니, 어찌 예배한다 하겠는가? 성인에게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범부를 속여 윤회에 덜어짐을 면하지 못하나니 어떻게 공덕을 이룰 것인가? 이미 얻은 것이 없으니 어떻게 도를 구한다 하겠는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7. 목욕시킨다는 진정한 의미
묻기를, "{온실세욕중승경(溫室洗浴衆僧經)}에 이르기를, '여러 스님들을 목욕시켜 주면 복을 한량없이 얻는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어떤 법을 의지하여야 공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관찰하기만 하여도 상응(相應)할 수 있겠습니까?"
답하시길, "여러 스님들을 목욕시킨다고 하는 것은 세간의 유위(有爲)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존께서 여러 제자들을 위하여 {온실세욕중승경}을 말씀하시어 목욕하는 법을 받아 지니게 하셨으니, 세상일을 빌려 참다운 종지(宗旨)에 비유하여 가만히 일곱 가지 공양의 공덕을 말씀하신 것이다. 일곱 가지라 함은 첫째는 맑은 물이요, 둘째는 불을 피우는 일이요, 셋째는 씻는 그릇이요, 넷째는 이쑤시개요, 다섯째는 맑은 재요, 여섯째는 밀크크림이요, 일곱째는 속옷이다. 이들 일곱 가지 일을 들어서 일곱 가지 법(法)에 비유한 것이다.
일곱 가지 법의 비유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법과 계율이니, 허물과 잘못을 씻는 것이 마치 맑은 물이 모든 더러움을 씻는 것과 같다. 둘째는 지혜이니 안팎을 관찰하는 것이 마치 타오르는 불이 맑은 물을 데우는 것과 같다. 셋째는 분별이니 모든 악을 가려 버리는 것이 마치 비누로 모든 때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넷째는 진실이니 모든 거짓말을 끊는 것이 마치 이쑤시개로 입냄새를 없애는 것과 같다. 다섯째는 바른 믿음이니 결단하여 망설임이 없는 것이 마치 맑은 재로 몸을 문질러서 모든 풍병을 물리치는 것과 같다. 여섯째는 호흡을 부드럽게 조절함이니 모든 굳세고 강한 것을 조복받는 것이 마치 밀크크림이 살갗을 부드럽게 하는 것과 같다. 일곱째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니 모든 나쁜 없을 뉘우치기를 마치 속옷이 추한 알몸을 가리는 갓과 같다.
이 일곱 가지는 모두가 경 속의 비밀한 법으로서 여래께서 모든 대승(大乘)의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을 상대하여 하신 말씀이지 소승(小乘)의 지혜가 얕고 근기가 하열한 범부를 상대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거늘 요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 뿐이다.
온실(溫室)이라는 것은 몸을 말하는 것이니 지혜의 불로써 계율의 탕을 맑고 따뜻하게 데워서 몸 안의 진여불성을 목욕시키되 일곱 가지 법을 지켜 스스로 장엄하는 것이다.
그때 비구(比丘)들은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모두가 부처님의 뜻을 깨달아 말씀대로 수행하여 공덕을 성취하여 모두가 거룩한 지위에 올랐거니와, 요즘 중생들은 어리석고 근기가 둔하여 이 일을 알지 못하고 세간의 물로써 육신만을 씻으면서 스스로가 교법에 의지했노라 하니, 그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진여불성은 어떠한 영상도 아니오, 번뇌의 때는 본래 형상이 없거늘, 그 어찌 형체 있는 물로써 무명(無明)의 몸을 씻겠는가? 사리에 맞지 않거늘 어찌 도를 깨달았다고 하겠는가? 만약 육신이 깨끗함을 얻는다고 한다면 항상 '이 몸은 본래 탐욕으로 말미암아 깨끗하지 못한 것에서 생긴 것이어서 냄새와 때와 분뇨가 뒤섞여 안팎에 가득하다'고 관찰하라. 이 몸을 씻어서 깨끗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진흙을 씻어도 맑아질 수 없는 것과 같으니, 겉으로 씻으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8-염불의 진정한 의미
또 묻기를, "경에 이르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念佛)하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묘문(妙門, 정토문)으로써 성불(成佛)한다는 것인데, 어찌 마음을 관찰하기만 하면 해탈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답하시기를, "염불하는 이는 반드시 바른 생각을 닦아야 한다. 요의(了義)를 바르다고 하고, 불요의(不了義)를 삿되다고 하는 것이니, 바른 생각으로는 반드시 서방에 왕생하거니와, 삿된 생각으로야 어찌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불(佛, Buddha)이라 함은 깨달음이니, 이른바 몸과 마음을 깨닫고 살펴서 악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요, 염(念, smrti)이라 함은 기억하는 것이니, 계행을 기억해 지녀서 잊지 않고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알아야 비로소 바른 생각이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생각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통발을 의지하여 고기를 잡고 말을 의지하여 뜻을 얻는 것이니, 이미 염불이라는 명칭을 붙였다면 모름지기 염불의 실체를 실천하여야 한다. 만약 생각에 실체가 없이 부질없이 입으로 명호(名號)만 외운다면 스스로 헛수고만 할뿐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또 입으로 외우는 송(誦)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염(念)은 이름과 뜻이 아득히 다르다. 입으로 하면 외운다 하고, 마음으로 하면 염(念)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염하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깨닫는 수행의 문이요, 외우는 것은 입에 속하는 것이므로 곧 이것이 음성의 형상임을 알아야 한다. 형상에 집착하여 복(福)을 구하는 것은 마침내 옳음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기를,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고 하셨으며, 또 이르시기를, '만일 물질로써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실천하는 것이니, 마침내 여래를 친견할 수 없다'고 하셨으니, 이것으로써 관찰하건대 일의 형상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과거 여러 성인들이 닦는 공덕은 모두가 다른 말씀이 아니라 오직 마음을 논하였을 뿐임을 알 수 있다. 마음은 여러 성인들의 근원이며, 마음은 모든 죄악의 주인이다. 열반의 즐거움도 마음에서 생기고, 삼계의 윤회도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은 세간을 벗어나는 문턱이요, 마음은 해탈하는 나루터이다. 문턱을 아는 이가 어찌 이루지 못할까 염려하고, 나루터를 아는 이가 어찌 도달하지 못할까 근심하겠는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9. 관심(觀心)의 궁극적 의미
가만히 살펴보니, 요즘 식견이 얕은 사람들이 오직 형상 세우는 것으로 공덕을 삼아 재물을 많이 허비하고 물과 뭍의 중생을 많 해쳐서 망령되게 불상과 탑을 조성하며, 헛되이 사람들의 노력을 수고롭게 하여 나무나 진흙을 쌓아올리며, 울긋불긋 단청을 하여 마음과 힘을 다 기울여서 자기도 손해 되고 남도 어리둥절하게 하고서도 아직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거늘 어찌 깨닫겠는가?
유위(有爲)의 법을 보면 부지런히 애착하나 무상(無相)을 말하면 곧 올올(兀兀)하여 미혹한 바보 같다. 세상의 작은 일에 욕심을 내다가 오는 세상의 큰 괴로움을 깨닫지 못하니, 이런 공부는 부질없이 스스로 피로하게 할뿐이다. 바른 길을 등지고 삿된 길로 돌아가며 거짓말로 복을 얻는다 한다.
다만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 비추어 각(覺, 거친 경계와 마음의 관찰)과 관(觀, 미세한 경계와 마음의 관찰)이 항상 밝고, 삼독(三毒)의 마음을 끊어 아주 녹여 없애고, 육적(六賊)의 문을 닫아 다시는 침노치 못하게 하면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수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과 한량없는 법문을 낱낱이 성취하여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을 증득함을 체험할 날이 멀지 않다. 깨달음이 잠깐 사이에 있거늘 어찌 흰머리가 될까 염려하겠는가?
참다운 법문의 그윽하고 비밀스럽고 깊은 이치를 어찌 다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간략히 마음 관하는 법을 설하여 그 일단을 밝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