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8-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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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달마의 안심론(安心論)-5.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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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달마의 안심론(安心論)-5.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보라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도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또한 마음은 피안에 닿아 있는 여울이다.
이 말은 맞지 않다. 마음이 피안에 이르는 여울이라면 명상은 무엇하는 데 쓰는가? 모든 힘이 마음에 속해 있다. 그리고 말들이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게다가 마음은 피안에 이르는 여울이기도 하다. 그러면 명상은 어디에 쓰여지는 것인가?
사실 마음은 피안에 닿는 여울이 아니다. 피안에 닿는 여울은 명상이다. 그리고 명상은 항상 무심을 의미한다. 마음이 완전히 소멸되었을 때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그대의 명상을 움직인다.
요사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들은 모양을 갖춘 것을 장점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재산을 함부로 탕진하며 수륙의 생물들을 살생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즉시 집착한다. 만일 그대가 모양 없음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귀머거리가 되어 넋을 잃고 앉아 있다. 현세의 작은 행복을 탐하느라 그들은 곧 커다란 고통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헛된 수행을 하고 있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을 좋아한다. 그들은 미래의 축복만 이야기한다. 만약 그대가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빛에 그저 집중해서 그 빛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세 가지 독과 여섯 도둑을 한번에 몰아낼 수 있다.
영어에는 디얀(dhyan)을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 비슷한 단어들이 세 개가 있긴 하지만 모두 조금씩 그 뜻이 다르다. 첫째로 집중(concentration)이란 말이 있다. 그것은 가장 단계가 낮은 말이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한 가지 생각이나 사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학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사실 집중이 없다면 과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은 집중의 산물이다.
두 번째로 묵상(contemplation)이 있다. 그것은 집중보다 좀더 높은 단계이다. 묵상은 한 가지 생각이 아니라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의 흐름들은 같은 주제로 제한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빛에 대해서 묵상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빛의 속도와 일곱 가지 색깔과 빛의 모든 생리에 대해서 생각을 계속한다. 그리고 빛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 철학이 바로 이런 차원에서 나왔다. 과학이 집중에서 나왔다면 철학은 묵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명상(meditation)이 있다. 그것은 가장 높은 단계이다. 그러나 디얀, 중국의 찬과 일본의 젠, 그리고 한국의 선과는 맞먹을 수가 없다. 디얀, 즉 선은 무심을 의미한다. 집중은 마음을 집중한다. 묵상도 마음이 묵상한다. 그리고 명상도 마음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선에 있어서는 마음이 사라진다. 선은 마음을 넘어선 침묵이다. 이 어록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디얀을 집중의 뜻으로 번역했다.
언어에 매여 있는 사람은 그 점이 가장 어렵다. 하나의 말이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본래의 뜻은 많이 감해진다. 그것이 깨달음에 관한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문제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의 번역서에 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것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책을 쓰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침묵을 즐기며 엑스터시에 빠져 있다. 그들이 그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말을 사용할 뿐 글을 쓰지 않는다. 대화 속에서 생겨나는 말에는 생명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서부터 나온다. 그것은 빛과 존재의 향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글로 표현되면 거기에서 생명력이 사라진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어떤 글도 쓰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빛에 그저 집중해서 그 빛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세 가지 독과 여섯 도둑을 한번에 몰아낼 수 있다.
여기에서 집중이란 단어를 명상이란 단어로 바꾸는 것이 더 좋다. 그래야 본래의 의미에 더 가까워진다. 만약 그대가 무심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빛이 된다. 모든 것이 기쁨으로 변한다.
그러면 수고로움 없이 그대는 무수한 덕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에 이르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 숭고함을 지켜보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백발을 걱정하고 있는가? 그러나 진리의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이 어록은 마지막에 가서야 그들의 스승인 달마의 본래 경지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 문장에서 달마의 진수를 다시 볼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 숭고함을 지켜보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백발을 걱정하고 있는가?
왜 내일을 걱정하며 늙음을 걱정하는가? 그러나 진리의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처음 '무명이 어디에서 나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바른 답이다. 이 어록은 빙빙 돌아서 결국 궁극의 지점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을 가진 스승의 고충이다. 아니 특정한 종파에 속한 제자들의 한계이다. 그들은 스승의 말에 자신들의 생각을 개입시킨다. 그리고는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며 그 책을 경전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스승은 죽고 없다. 스승은 그 책이 완벽한 자신의 말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는 이미 세상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 신선하고 생명력이 있었던 가르침들이 후대에 가서 껍데기만 남는 종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선불교는 그래도 훨씬 나은 편이다. 그것은 아직도 생명력을 담고 있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종교이다. 그래서 그것은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다. 앞으로 과학과 철학과 종교가 완전히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 날에 지구상에 도래하면 그때 선(禪)은 유일한 종교가 될 것이다.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이 대답이 그때 바로 기록되었다면 달마의 어록은 완전히 순수한 황금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의 말을 통해서 그대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록의 어떤 부분이 가짜이고 어떤 부분이 진짜 달마의 생각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가 명상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그대는 명상 속에서 어떤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비유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어떤 훈련 체계에 불필요한 수고를 쏟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어록이 이처럼 양면을 모두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제 그대는 양면을 모두 지켜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깨어 있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경전도 실수가 섞여 있음을 말이다. 그대는 깨달은 뒤에도 잘못할 수 있다. 깨달은 뒤에 단체를 만든다면 잘못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잘못이란 최선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최선의 것이 아니면 참을 수가 없다. 그것이 나의 문제이다. 어떤 잡티도 섞이지 않은 오직 순수한 황금만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제자도 두지 않는다.
이번에 달마의 어록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은 매우 좋은 일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깨달음의 경지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계속 말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많은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지켜보라. 달마 어록조차도 정확하게 잘잘못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대가 달마의 어록을 가려낼 정도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면, 가톨릭의 교황이, 힌두교의 샹카라차랴가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이 세상의 어떤 누구라도 그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늙은 유태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임종을 맞이해서 그는 계속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가 무슨 말은 하는지 듣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신이시여, 우리는 4천 년 동안 당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는 다른 민족을 당신의 선민으로 선택할 수 없겠습니까? 당신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토록 많은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죽어가는 한 늙은이의 말을 들어주소서. 이제 다른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로서 선택해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게 해주소서. 우리는 충분히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끝장이 났습니다."
이제 그대의 교황을 보라. 그대의 샹카라차랴와 호메이니를 보라. 그대의 자이나 승려들과 불교 승려들을 보라. 그대는 이 사람들이 깨달은 존재가 아님을 알 때 놀랄 것이다. 이들의 말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들은 교육받은 대로 진리도 아닌 죽은 말들을 앵무새처럼 옮기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계속 그 난센스 같은 말들에 세뇌되어 왔다.
이런 일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왔다. 이제 그런 일은 멈춰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명상을 함으로써 누가 궁극의 과녁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누가 단지 흉내만 내는지를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지성을 얻어야 한다.
이 어록은 그대로 하여금 그런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과정이 되었다. 깨어 있으라. 속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계속 사기를 당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근사한 말을 하더라도 그대는 우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의 모든 면을 지켜보라. 그의 말이 진정 그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남에게서 들은 말을 그냥 읊조리는 것인지를 살펴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드디어 진정한 스승을 발견했다."
그대의 마음에 대해서 깨어 있으라. 그대의 마음이야말로 가장 큰 적이다.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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