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8-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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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달마의 안심론(安心論)-4.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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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달마의 안심론(安心論)-4.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보라
그럴 수 없다. 언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몸을 씻기 위해서는 그대가 그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한번 욕망으로부터 더러움과 오물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그대의 안과 밖을 모두 덮어버릴 때까지 계속 생겨난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이 몸을 깨끗이 씻고자 한다면 그대의 육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도 안 된다.
그들은 지금 그대가 보이는 이 육체를 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깨끗하게 하려면 몸이 다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그대는 깨끗해질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몸을 씻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것은 자살행위이다.
그러나 그대는 몸이 사라지는 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을 문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단지 때와 먼지만 벗겨내면 된다. 그때까지만 몸을 문지르면 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 곁에 가도 악취가 안 날 정도만 씻으면 되는 것이다. 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문지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달마의 제자들은 지금 그대에게 부처가 욕장경에서 한 말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달마가 '영혼은 항상 깨끗한 것이어서 더러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자신들이 앞에서 기록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불성은 항상 순수하다.'라고, '불성은 결코 더럽혀질 수 없다.'라고 그들은 앞에서 이미 기록했다. '그대는 이미 깨달았으며 단지 잠을 자고 있을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그것은 '씻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그대의 마음을 지켜보는 문제이다.'라고 기록했다. '마음을 지켜보면 점점 그대는 깨어나게 된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완전히 깨어나는 순간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들은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것은 무명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고 나서부터였다. 사람은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함정에 빠질 것이다. 이제 그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어디서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니 그대는 욕장경에서 부처가 한 말이 어떤 외부적인 것을 닦음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외부적인 것만 닦는 것이 필요하다. 내면적인 것을 닦을 필요도 없고 닦을 수도 없다. 내면은 더럽혀지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입문하려고 찾아온 구도자들은 또 물었다. "경전에는 사람이 진심으로 부처를 부르면 그가 죽은 뒤에 서방정토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이 불성으로 들어가는 문일진대 왜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합니까?"
달마가 마음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구도자들은 그러면 왜 부처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말했는지 계속 의문이 일어난다. 그리고 달마의 제자들은 그의 스승에 대해서 틀렸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부처가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틀린 것은 대승불교에 집착한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경전에 옮겨 놓고는 그것이 부처가 한 말이라고 한 점이다. 하지만 달마의 중국계 제자들은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이해와 깨달음은 단지 마음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마 부처의 이 말들은 그의 제자들이 써넣은 것이니라. 하지만 나는 내 경험만을 말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이 달마를 이처럼 간단하게 표현했다면 그런 어려움에 떨어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구도자들의 질문은 계속되고 있고 그들은 무의미한 대답을 하고 있다.
부처는 깨어 있음을 말했다. 몸과 마음이 깨어 있을 때 거기에서 어떤 악도 일어날 수가 없다. 부처를 부르는 것이란 그대의 마음을 부르며……그들은 달마의 이 말을 앞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기록했다. 만약 부처를 부르는 것이 마음을 부르는 것과 같은 말이라면 왜 부처는 '마음을 부르는 것'이라고 바로 말하지 않았는가? 부처는 복잡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명확한 방법으로만 말한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비유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노력은 그대의 마음을 평정시켜서 쉽게 그것을 넘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무심(無心)으로 하여금 수행의 법칙을 따르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달마는 그대가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수행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앞에서 누차 말했다. 거기에는 어떤 법칙도 필요 없다. 오직 그대의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 즉 그대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이 그대를 도와줄 수 있다.
부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대는 다르마를 이해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의 입은 공허한 이름만 부르는 것이다. 그대가 아집과 삼독심으로 고통을 받는 한 그대의 더럽혀진 마음은 그대로 하여금 부처를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모양에 집착한다면 그 의미를 찾더라도 그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성현들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살피는 수행을 했다.
이 말들은 절대적으로 부적합한 말들이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생각을 제쳐 두고 무슨 내면을 살펴본단 말인가? 그대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 말이 아닌가? 말과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다. 먼저 그대는 내면을 살핀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말로 그것을 끄집어낸다. 그대는 '라마'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대는 그것을 '라마'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다면 생각은 먼저 그대 자신에게 말한 것이다.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생각이며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생각은 하나의 독백이다. 모든 사람들이 항상 그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성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죄인들도 그것을 할 수밖에 없다.
그대가 하루 종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생각이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앉고 눕고 걷고 움직이는 가운데 그대는 수천 가지 생각을 계속한다. 과거의 성현들은 생각만 살펴보고 말은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만약 성현들이 말하지 않았다면 그대가 볼 수 있는 경전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베다}는? {우파니샤드}는 어디서 나왔는가? 부처의 {법구경}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리고 그들의 스승인 달마의 말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들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그대가 볼 수 있는 모든 경전들은 성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중생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현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의 내면적 경험에만 맞추어서 말했다. 만약 그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하면 그는 묵묵히 있을 뿐이다. 그는 언어를 초월하는 영역에 있다. 그래서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만약 생각이 가능하다면 말도 역시 가능하다.
단지 지켜보라. 생각은 그대 안에서 말하고 있다. 그대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입으로 말하지 않고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왜 말로 그 단어들을 표현할 수 없겠는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생각도 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말과 생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 마음은 모든 덕의 근원이다. 이제 나는 이 말이 순수한 난센스 그 자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스승인 달마도 앞에서 말했다. 이 마음은 넘어서야 하는 것이며, 이 마음은 그대의 속박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마음은 완전히 비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그대는 무심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심은 모든 덕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아니다. 만약 마음이 모든 덕의 근원이라면 무심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무심의 목적이 무엇인가? 모든 덕은 모든 덕 속에 있다. 그때는 오직 죄만 남는다. 그러면 무심은 모든 죄의 근원이란 말인가? 명상은 그대 속에서 죄를 만들기 위한 것인가? 제자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한번 그대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한번 꾸며대기 시작하면 다시는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이 마음은 모든 덕의 근원이다. 또한 이 마음은 모든 힘의 으뜸이다. 그러면 불성과 그 힘은 어떻게 되는가?
열반의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여기서 그들의 말은 조금 스승의 가르침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다. 마음이 쉴 때 그것은 고요해진다. 열반은 마음이 죽을 때 일어난다. 그것은 단지 쉬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마음이 쉬는 것은 어느 순간 다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완전히 죽어야 한다. 그래야 그대는 절대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골칫덩어리가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골칫덩어리가 쉬고 있을 때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많은 에너지를 충전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더 큰 문제가 생겨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치게 된다. 사실 모든 사람이 지쳐 있다.
계속 칭얼대는 아이를 가진 한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와 한 집에서 산 적이 있다. 그 친구 부부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외동아들이었고, 그들은 그 아이를 너무 사랑했다. 그 집에서 나만 유독 아이 때문에 지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들이 나에게 물어 보았다. "왜 그 아이는 당신을 귀찮게 하지 못합니까?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말했다. "내가 그 아이를 귀찮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부르면, 그 아이는 절대 내 곁에 오지 않는다."
그들은 호기심을 가지면서 내게 물었다. "어떻게 그 아이를 귀찮게 했나요? 그 아이는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계속 칭얼거리고, 물건을 깨뜨리고, 소파에서 탁자로 마구 뛰어다닙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가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지 보여 주겠다."
그리고는 그 아이에게 나는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는 내게 말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거야."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아이는 가만히 앉아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집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그 집을 반으로 나누어 내가 반을 사용하고, 그 가족이 나머지 반을 사용했다. 그리고 한번씩 그 아이가 내가 사용하는 쪽으로 오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사는 곳으로 오려면 너는 뭔가를 갖고 와야 한다."
그러면 그 아이는 다시 물었다. "무엇을요?"
그때 나는 말했다. "돈이 아니다. 네가 나에게 오려면 먼저 이 집을 일곱 바퀴 돌고 나서 올 수 있다. 그리고 정확히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한다. 속여서는 안 된다."
그 집은 매우 큰 집이었다. 그래서 집을 일곱 바퀴를 돌면 어른도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 아이는 일곱 바퀴를 모두 돌고 난 뒤에 나에게 오면 지쳐서 소파에 쓰러져 버린다. 그러면 나는 가서 "기분이 어때?"하고 묻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어요."
그러면 나는 내 일을 다시 시작하고 그는 소파에 누워서 쉰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우리는 아이가 당신이 자기를 괴롭혔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나는 그 아이를 다루는 방식을 알아냈다. 그가 나를 만나러 오고 싶을 때마다 먼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집 주위를 일곱 바퀴 도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오면 내게 아무것도 조르지 않는다. 아이는 지쳐서 쉬어야 한다. 그러다가 잠이 들고 나는 내 일을 한다."
마음이 쉬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마음은 그것이 더 이상 살아날 수 없는 점까지 완전히 이르러야 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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